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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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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19 혁명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혁명이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과 부정부패, 3·15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으며, '4·19 민주혁명', '4·19 학생운동' 등으로 불린다. 1960년 4월 19일,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제2공화국이 출범했지만,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1년 만에 붕괴되었다. 4·19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지만, 미완의 혁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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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4월 혁명
한글4·19 혁명
한자四一九革命
일본어よん・いちきゅうかくめい
가타카나サイルグヒョンミョン
로마자 표기Sailleogu hyeongmyeong
발생 시기
날짜1960년 4월 11일 ~ 4월 26일
배경 및 원인
주요 원인3.15 부정선거김주열의 죽음
목표민주화이승만의 하야
진행 과정
시위 방법데모
결과
주요 결과제2공화국 출범
영향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및 망명
참여 세력
시위대대한민국 국민
민주당
정부 측자유당 정권
대한민국 경찰
주요 인물
시위대 측 주요 인물장면
윤보선
정부 측 주요 인물이승만
이기붕
규모 및 피해
참여 인원10만 명 이상
사망자186명 (시민)
부상자6,026명 (시민)
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
관련 정보
관련 사건4월 19일 운동
기념일4.19 혁명 기념일
관련 정보http://world.kbs.co.kr/service/news_view.htm?lang=j&Seq_Code=87715(KBS WORLD Japanese)

2. 명칭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혁명으로 승격되었다.[46][47]

3. 역사적 배경

1948년 이승만
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했다. 이승만은 주한 미군정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로의 권력 이양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수립을 감독했으며, 한국 전쟁 중 대한민국을 이끌었다. 냉전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주의적이고 친미적인 입장을 취했다.[3]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제한적인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보였고, 권력 유지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여 국민의 분노를 샀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승만을 권위적인 방법으로 통치를 유지하고 정부 내 부정부패비리를 행한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로 널리 인식했다.[3]

1958년 12월, 이승만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야당 의원들이 투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광범위한 새로운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는 국회 국가보안법 개정을 강행했다. 1959년, 이승만은 미국이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줄이자 충격을 받고 위협을 느꼈고,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필사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4]

196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상대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100만 표를 얻은 소규모 진보당의 조봉암과 민주당의 조병옥이었다. 1959년 7월, 이승만은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고발했고, 진보당 당수는 이후 투옥되어 신속하게 처형되었다.[5] 조병옥은 위암 수술을 위해 월터 리드 육군 의료 센터로 미국에 갔지만,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6]

3. 1. 3·15 부정선거

1960년 대통령 선거자유당이승만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민주당에서는 조병옥장면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선거 운동 기간 중 조병옥이 사망하면서 이승만의 4선은 거의 확실시되었다.[18]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우세하여 여야가 대통령과 부통령을 나눠 갖는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자유당 정부는 관료 기구, 용공 조직,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부정 선거[19]를 자행, 이기붕을 당선시키려 하였다.[20]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100만 표를 얻은 진보당의 조봉암1959년 7월 이승만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고발되어 투옥, 처형되었다.[5] 조병옥은 위암 수술을 위해 미국 월터 리드 육군 의료 센터로 갔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6] 이 두 사람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큰 우연으로 여겨졌다.

정부는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 독찰하게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48] 2월 28일 대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28 대구 학생의거)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촉발시켰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강경 진압은 마산 시민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같은 날 마산 민주당 당원들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저녁 7시 30분경 약 1,000명의 시민들이 민주당 마산 지부 앞에 모였고, 경찰과 대치 중 도시 가로등이 꺼졌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자 시위대는 돌을 던져 맞섰다.[8]

3월 15일, 병상에 누워 있던 이기붕은 822만 5,000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장면은 185만 표를 얻었다. 국민들은 선거가 부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 전국적으로 민주당 집회가 금지되었고, 선거 당일 수백 장의 미리 표시된 투표 용지가 투표함에 투입되었다.[3]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 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53]

3. 2. 3·15 마산 의거와 김주열의 죽음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규탄 시위를 벌였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강경 진압을 지시했고, 이에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48] 이는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60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3·15 마산 의거를 다룬 기사가 실렸다.

'''3·15 의거'''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 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52] 3.15의거는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김주열3·15 마산 의거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약 한 달 뒤인 4월 11일, 김주열은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54]

시민들은 김주열의 시신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모습을 확인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고,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3.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세종로-태평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49]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오후 4시경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정치깡패들에게 피습당했다.[49] 이들은 쇠갈고리, 쇠사슬, 쇠망치 등으로 무장하고 학생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학생 한 명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현장을 취재하던 사진기자 3명도 구타당하고 카메라를 빼앗겼다.[50]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1960년 4월 18일)


이 사건은 학생 시위의 주역을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시위 목적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49][50]

4. 4·19 혁명의 전개

1960년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2·28 대구 학생의거) 이후,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강경 진압으로 일관하여 마산 시민들의 분노를 샀고, 이는 4·19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48]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마산상업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김주열3·15 마산 의거 때 행방불명되었다가 약 한 달 뒤인 4월 11일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54]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서울 세종로-태평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귀가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에게 피습당하는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발생했는데,[49] 이 사건은 학생 시위의 주역을 지방 고교생에서 서울 대학생으로, 시위 목적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0]

4월 19일 시위대의 구호는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 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독재 정권 퇴진과 민주 수호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51] 정부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위는 계속되었고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51]

4. 1. 4월 19일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는 서울 시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등 주요 대학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55]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4월 18일에 이미 경찰 폭력에 항의하며 국회에서 비폭력 시위를 벌였으나,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이승만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은 폭력배들에게 공격당했다.

4월 19일, 학생들은 경무대(현 청와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시위대 규모는 2만여 명에 달했으며, 중·고등학생과 일부 시민들도 참여하여 오후 2시 30분경에는 20만 명이 넘었다.[28]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부정선거 무효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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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경무대와 중앙청 부근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55] 이로 인해 18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11] 이에 격분한 일부 시위대는 경찰서, 서울신문사 사옥, 반공회관 등을 방화·파괴했다.[28]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경찰청과 법원에 관대한 처리를 요청하고,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62] 그는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을 설득하여 학교로 돌아가도록 유도했으며, 불량 청년들이 시위대에 끼어들어 선동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62]

연세대학교에서는 김병철, 김달중, 안병준 등이 주도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김병철은 직접 플래카드를 만들고, 백낙준 총장의 설교가 끝난 후 연설을 통해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나섰다.[63] 그는 경찰과의 충돌로 부상을 입었지만, 서울역을 거쳐 청와대까지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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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 청주, 인천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28]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시위로 인해 사망 183명, 부상 6,259명이 발생했다.[28] 이승만 정권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한국군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시위대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4. 2. 4월 25일 대학교수단 데모

1960년 4월 25일,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인한 학생들의 희생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대학교수들의 시위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4·19 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55] 이 시위는 계엄령 하에서도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시민과 학생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대학교수들의 시위는 4월 26일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졌다.[12]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 폭력에 항의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하며 국회에서 비폭력 시위를 벌였으나, 캠퍼스로 돌아오는 길에 이승만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은 폭력배들에게 공격받았다.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는 10만 명이 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이승만의 사퇴를 요구하며 청와대로 행진했고, 경찰은 발포하여 약 180명을 사망케 하고 수천 명을 부상시켰다.[11]

4. 3.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60년 4월 25일, 서울대학교에서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400여 명이 모여 대통령과 국회의원, 대법관의 사퇴, 정부통령 재선거 실시, 부정선거 처단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채택한 후, “4·19 의거로 쓰러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 행진을 벌였다.[31][32] 이 4·25교수단 데모는 아무런 혼란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이에 자극받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다시 활발해졌다.

4월 26일, 교수단 시위 다음 날, 학생과 시민들은 “재선거 실시”, “현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시작했다. 그 규모는 수만 명으로 불어나 세종로, 국회의사당, 그리고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다. 경복궁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대통령 동상은 시위대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허정 외무부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퇴를 설득했고, 26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의 중재로 이루어진 대통령과 시위대 대표 간의 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下野)할 것을 표명하고, 같은 날 오전 10시경 라디오를 통해 사임을 발표했다.[33][34] 국회에서는 오후 긴급 본회의를 열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35]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날인 27일에 공보실을 통해 사임을 공식 발표하고 국회에 사표를 제출했으며, 즉시 수리됨으로써 12년간의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다.[36]

4. 4. 이기붕 일가 변사

1960년 4월 28일, 경무대 내 이기붕 일가가 거주하던 별관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이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38][39] 이 사건은 4·19 혁명으로 인해 몰락한 이기붕 일가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이강석은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진 인물로, 이승만의 양자가 되면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4. 5. 장면 부통령의 사퇴

1960년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항의와 민주화를 위한 결단의 표시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78] 당시 헌법은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장면은 이승만이 사퇴하기를 기다렸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데 அதை 포기한 것이다.

장면은 부통령직 사임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 이승만에게 정권을 내놓더라도 자신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79]
  •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을 느껴야 했다.
  •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었다.[79][80][81]


장면의 부통령직 사임에 대해 이영석은 이승만이 하야하면 잔여 임기가 4개월도 안 되지만 그동안은 장면이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거부한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79][82]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에 대해 정략적 사임설을 주장하며, 그가 새 정부의 실권을 잡는데 보다 유리하리라는 정치적 타산에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고 비판했다. 독재 방지를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면 내각제 개헌을 실현해야 하는데, 현직 대통령에 있으면서 차기 정부 국무총리직 경쟁에 나서는 것은 여론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내다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79]

민주당 구파 인사였던 김도연은 1968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가 이승만 하야를 촉진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였으나, 당시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유지한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79][83]

장면이 국회에 사표를 전달한 이후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대통령이나 부통령의 임기 도중 사퇴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과 김성수 제2대 부통령이 사임했을 때는 부통령 선임권이 국회에 있었으므로 사표 역시 국회에서 수리하였으나, 장면은 국민 직선으로 당선되었기에 국민이 뽑은 부통령을 국회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같은 전례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통령의 당선 공포는 국회의장이 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국회는 사퇴 역시 국회의장의 선포로 효력이 생기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재학 국회부의장이 장면의 사표가 접수되었음과 장면이 사임하였음을 발표함으로써 문제는 일단락되었고, 이는 얼마 후 이승만 대통령의 사표를 수리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은 곽상훈 국회의장의 선포로 공식화되었다.[84]

5. 4·19 혁명 이후

4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 진압 경찰의 발포로 인한 시민 사망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고, 방송을 통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4월 24일에는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4월 26일 오후 1시,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 하야 의사를 밝혔다.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하는 이승만 박사와 전별하는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같은 날 오후 2시,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4월 27일 오후 3시, 국회에 제출된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가 수리되었다. 대한민국 부통령 장면도 사퇴함에 따라, 외무부 장관 허정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이승만 부부는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은 1948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주한 미군정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로의 권력 이양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수립을 감독했으며,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대한민국을 이끌었다. 냉전 시기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주의적, 친미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공산주의 위협을 구실로 야당을 탄압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통합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러한 행위가 용인되었지만,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제한적인 경제적, 사회적 발전만을 이루고 권력 유지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승만을 권위적인 통치 방식과 정부 내 부정부패를 일삼는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로 인식하게 되었다.[3]

196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다. 그러나 3월 15일, 병상에 누워 있던 이기붕이 큰 표 차이로 부통령에 당선되자, 국민들은 선거가 부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 이승만의 사퇴와 이기붕 일가의 사망으로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3]

국회 조사위원회는 경찰의 발포가 군중 해산이 아닌 시위대를 살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밝혀냈다. 이후 형사 재판에서 공안부장 박종표가 김주열의 시신에 돌을 묶어 마산 앞바다에 버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종표는 김주열을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혁명재판에서 여러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일부는 집행되었다.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들도 처형되었다. 발포 명령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최인규 내무부 장관과 곽영주 대통령 경호실장은 1961년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13][14]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제2공화국을 전복하고 군사정권을 수립했으며, 이후 대한민국 제3공화국을 세웠다.[4][15]

1965년 7월 19일, 90세의 이승만은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5. 1. 허정 과도정부 수립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대한민국 부통령 장면도 사퇴하면서, 외무부 장관 허정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74] 허정은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을 주선했다.[85] 그는 이승만의 출국을 비밀리에 추진했으며, 주한 미국 대사와 상의하여 이승만을 출국시켰다.[87]

5월 29일 새벽, 허정은 이수영 외무부 차관에게 이승만 내외를 이화장에서 모셔오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가 이승만을 배웅했다.[85] 이승만은 허정에게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아이젠하워 대통령)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86]

이승만 부처가 하와이로 떠난 후, 허정은 공보실을 통해 이승만의 출국을 발표했고, 국회언론, 국민들은 이승만의 출국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86] 5월 30일 국회에서는 이승만 망명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었고, 허정은 국회에 나가 이승만 출국의 경위를 설명하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89] 장면은 과도정부에 이승만의 탈출 경위와 진상을 밝히도록 요구하며, 부패와 독재, 학정에 대해 인책·사과하지 않고 망명한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89] 그러나 곽상훈 국회의장과 많은 간부들은 '영감 잘 내보냈소.'라며 오히려 허정을 격려했다.[86]

5. 2. 대한민국 제2공화국 출범

196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다. 그러나 3월 15일, 병상에 있던 이기붕이 큰 표 차이로 부통령에 당선되자 국민들은 선거가 부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 이후 이승만의 사퇴와 이기붕의 사망으로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3]

4월 26일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4월 27일 이 대통령의 사임서를 수리하였다. 대한민국 부통령 장면도 사퇴하였으므로, 허정 외무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6월 15일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7월 의회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었고, 8월에는 윤보선이 대통령에, 장면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제2공화국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이 속한 구파와 장면 국무총리가 속한 신파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경제 상황 침체와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해방된 국민들의 활발한 정치 활동으로 인해 한국 전역에서 데모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결국 1961년 5월,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 등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제2공화국 체제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붕괴되었다.[15]

5. 3. 관련자 처벌

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발포 책임자, 정치깡패 등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졌다.[19] 최인규, 곽영주 등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었다.[20]

6. 북한의 반응

1960년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93] 4월 21일 김일성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93]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93]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93]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93]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는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한국어

한편 김일성은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남한의 평화적 접수도 가능할 것이라며 국제사회에 대한 설득을 주문하기도 했다.

1995년 국립묘지로 승격된 이후 2007년 5월 19일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4.19 국립묘지에 방문했다. 홍성옥 위원장은 방명록에 "4.19 용사들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의지를 안고 일본의 과거 청산을 위한 활동에서 조선 민족의 대중적 화합으로 투쟁할 때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북측 일행을 안내한 소장은 "이들이 4.19에 대한 깊은 배경 지식을 갖고 찾아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4.19라는 ‘혁명’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접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94]

7. 평가

선거법위반
업무상 횡령
허위공문서작성과 행사사형곽영주경무대 경호실임자살인
권리행사방해
조세범처벌법위반사형백남규서울시경 경비과장살인무기징역장면 부통령 저격 배후 사건임흥순서울시장살인미수
뇌물수수
허위공문서 작성과 행사
선거법위반사형이익흥내무장관살인미수사형김종원치안국장살인미수
위증사형장영복치안국 특정과장살인미수
위증사형박사일치안국 중앙분실장살인미수
위증
선거법위반사형오충환서울시경 사찰과장살인미수
위증사형정치깡패 사건신도환반공청년단장선거법위반 등징역7년임화수반공예술인단장징역10년유지광징역10년임상억징역5년강승일이정식문장주차순환신동호주요한김성종김태련조열승홍영철징역3년최창수이경수박호징역2년6개월오윤석징역1년6개월김복록백청일,원민수,이수보,김재운,강효상단기3년 장기5년서울시, 경기도 선거사범 사건최응복서울시 부시장선거법위반징역2년6개월김용진서울시 내무국장징역3년김남희서울시경 사찰과장선거법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등
업무상 횡령징역5년최헌길경기도지사선거법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등징역7년이순구경기도 내무국장선거법위반징역3년이상국치안국 특정과장고종엽경기도 사찰과장선거법위반
직권남용징역5년고상원서울시경 보안과장허위공문서 작성 등
업무상 횡령징역3년민주당 전복 음모사건신산한법무부 차관무고 교사 등징역2년이태희징역4년김시현민의원무고징역8개월유시태제3세력 제거 음모사건이정재살인교사징역10년



공주 노인회에서 세운 4·19 혁명 기념비

7. 1. 긍정적 평가

4·19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김성식은 《사상계》기고를 통해 4월 혁명이 민주주의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한국 시민의 개혁과 학생들의 정치, 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7가지 의의를 제시했다.

# 민주주의는 가열한 투쟁으로 이루어지며 이것만이 가치있다는 것을 경험.

# 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에서 우리 민족을 높이 평가.

# 혁명의 원인은 부정선거였으나 근본정신은 20년간 누적된 부패정치와 사회악에 대한 항거.

# 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민주체제가 성립.

# 혁명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

# 혁명으로 세계 민주 운동사에 동참.

# 혁명으로 시민의 전체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의 정치, 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됨.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은 4월 혁명의 정신을 "반독재민주, 반외세자주, 반분열통일, 반기득권민중주의"라고 정의했다. 그는 4월 혁명이 단순한 정권 타도를 넘어, 미래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한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반드시 시작해야 할 시원, 고향이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상, 목표로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4.19혁명은 민족정기이자 혼이요 생명이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이고 정신이라고 하였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월 혁명을 낡은 것과 썩은 것을 퇴치하고, 봄처럼 새 생명이 돋아나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낡고 썩은 것은 이승만과 자유당 간부 대다수를 차지한 친일파, 그리고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 낡은 봉건 인습을 의미한다. 그는 4월 혁명을 통해 한국인이 일종의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정신혁명'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95]

4·19 혁명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라는 목표를 넘어,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퇴진과 이기붕에 대한 심판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7. 2. 부정적 평가

역사학자 한홍구는 4·19 혁명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이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고 평가했다.[96] 이 때문에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유당 지지 세력과 일부 우익 세력은 4·19를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태'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4.19 사태는 혁명으로 보고 싶지 않으며,[97] 4월의 희생자들의 민주 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였고 결코 혁명은 아니었다[97]고 평가했다. 허정은 4.19 사태가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 정권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으며,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97]고 주장했다. 그는 '4.19 의거는 혁명이 아니다'[98]라고 하였다.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윤치영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99]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 '4.19 사태'라고 보았다.[99]

7. 3. 논란

3·15 의거의 발원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마산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호남 4·19 혁명단체총연합회는 광주에서 마산보다 3시간 앞서 유혈 봉기가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장하고 있다.[101]

호남 4·19 혁명단체총연합회에 따르면, 1960년 3월 15일 광주 동구 충장로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곡(哭)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있었다. 투표소에서 부정 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폭행했고, 이에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 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민주주의 사망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행진하던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라남도 광주에 이어 오후 1시에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민주당 당원들이 시위를 벌였고, 오후 3시 30분 경상남도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101]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었고[21],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4·19 단체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사실상 도화선이 되었다고 주장한다.[101]

김영용 호남 4·19혁명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마산보다 3시간 앞섰는데도 역사는 마산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며 "사실상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광주 3·15의거"라고 말했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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